한국과 쿠바가 14일 외교관계를 전격 복원했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1959년 단교한 이래 65년 만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수교를 제안해 결실을 맺는데 24년 걸렸다. 북한은 형제국 쿠바마저 등을 돌려 국제사회에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됐다. 대통령실은 15일 “이번 수교로 북한은 정치적·심리적으로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쿠바가 그동안 수교 문제에 있어 한류나 한국에 대한 긍정적 호감에도 불구하고 수교에 응하지 못한 건 북한 때문”이라며 “이번 수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세가 어떤 것인지, 대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로써 한국을 외면하고 북한과 수교한 유엔 회원국은 전세계에서 시리아만 남았다.
수교의 직접적인 물꼬는 윤석열 정부 들어 트였다. 정부는 ‘글로벌 중추국가(GPS)’를 기치로 내걸고 쿠바와 수교에 공을 들였다. 2022년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제안하며 쿠바와 접촉면을 넓혀갔다.
쿠바는 회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당시 쿠바에서 위로 전문을 보낸 것이 전기가 돼 외교부 중남미국장이 비밀리에 쿠바를 방문하면서 대화 채널이 다시 열렸다. 이어 지난해 5월 박진 당시 외교부 장관은 카리브국가연합 각료회의가 열린 과테말라로 날아가 호세피나 비달 쿠바 외무부 차관과 만났다. 이 때 수교 협의를 시작하기로 양국이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은 “양국이 ‘윈윈(win-win)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데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양국은 부쩍 속도를 냈다. 지난해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양국 외교장관이 비공개로 만났다. 쿠바 정부 인사들도 한국을 찾았다. 박진 전 장관은 2023년 한 해 동안 쿠바 측 고위인사와 3차례 만나며 수교를 조율했다.
이달 설 연휴 직전 급진전이 이뤄졌다. 쿠바 정부가 수교 의사를 전달해왔다. 협상은 연휴 내내 미국 뉴욕 주유엔대표부를 통해 진행됐다. 황준국 대사와 헤라르도 페날베르 포르탈 대사를 포함, 극소수만이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협의 내용이 수시로 보고됐다.
국내에서도 비공개로 가림막을 쳤다. 지난 1일 한덕수 총리 주재 국무회의에서 수교안을 의결했다. 한 총리조차 안건이 적힌 자료를 보고나서야 수교 방침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국은 뉴욕 현지시간으로 14일 오전 8시 외교 공한을 교환한 뒤 ‘정확히 5분 뒤 공표’하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이번 수교를 “한국 외교의 오랜 숙원”이라고 평가했다. 정권마다 셈법과 접근은 달랐지만,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라는 목표에 맞춰 일관된 외교를 펼친 덕분에 맺은 성과라는 것이다.
수교 협의가 시작된 건 김대중 정부 때다. 정부는 1999년 10월 유엔 총회의 대쿠바 금수조치 해제 결의안에 처음 ‘찬성’표를 던지고 이듬해인 2000년 쿠바에 수교 교섭을 공식 제안했다. 이후 유엔에서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 해제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다룰 때마다 쿠바의 편에 섰다. 한국은 2005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 코트라 사무소를 개설했다.
하지만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2013년 유엔 총회 기간 양국 외교장관 회담이 성사됐고, 2014년 쿠바 외교부 차관보가 방한했지만 그뿐이었다. 2016년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이 한국 외교수장으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2019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으로 답보상태에 빠졌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의식해 쿠바와 수교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마침내) 중남미 모든 국가와 수교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중남미 외교, 나아가 글로벌 중추 국가의 외교 지평이 확대됐다”는 것이다. 쿠바는 중남미 카리브지역 국가 가운데 마지막이자 한국의 193번째 수교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수교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방해공작도 서슴지 않았다. 2015년 정부가 쿠바와의 수교 의사를 내비치자 리수용 당시 외무상을 쿠바에 보내 친선 방안을 논의했다. 쿠바는 같은해 9월에는 라울 카스트로 의장의 후계자인 미델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수석부의장(현 대통령)이 방북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우의를 과시했다.
2016년 윤병세 전 장관의 쿠바 방문을 앞두고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쿠바를 먼저 찾아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며 한국을 견제하기도 했다. 쿠바는 윤 전 장관과의 회담 직후 살바도르 발데스 메시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보냈다. 쿠바가 이번 수교협의에서 철저한 보안을 요청한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그럼에도) 쿠바 역시 190여국과 수교를 하는데 수교를 안 하는 나라가 한국과 이스라엘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과 한류 확산에 따라 쿠바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부연했다. 쿠바 현지에는 약 1만 명 규모의 한류 팬클럽인 ‘아트코르(ArtCor)’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인도적 지원도 영향을 미쳤다. △2022년 8월 연료저장소 폭발 사고 △2023년 6월 폭우 피해 △올해 초 식량 부족 사태 때 쿠바를 적극 도왔다. 매년 7월 서울에서 열리는 쿠바 영화제에 박진 전 장관과 외교부 간부들이 참가했고, 지난해 12월 쿠바 카바나 영화제에는 한국영화 특별전이 열려 양국의 관계가 한층 돈독해졌다. 박진 전 장관은 통화에서 “지난해 몇 차례 모멘텀이 있었다”며 “자연스럽게 쿠바와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수교를 이뤄낸 건 GPS 외교의 결실”이라고 말했다.